천 개의 파랑

책 읽는 두루미 2023. 1. 21. 00:12
천 개의 환상적인 별조각 같은 소설



'천 개의 파랑'. 이름만 들어도 눈부시게 반짝일 것 같은 소설이다. 과연 이 제목을 감당할 만한 소설인지 기대하며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부서지는 별조각 같은 파랑빛 여운에 싸였다. 이 소설은 가장 인간적인 비인간(로봇) 콜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덮을 때까지, 작가가 콜리를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로봇으로 설정했는지 아닌지 끝내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콜리가 보여준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비록 의도하지 않은 학습된 것들이지만)은 인간보다 더 따뜻하게 마음을 덥혀주었다. 파란 하늘을 사랑하는 이 로봇은 정말 사랑스럽게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학습된 내용만 말하는 로봇이지만, 그가 던지는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특히,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말하는 보경에게 했던, '천천히 다시 흐르게 하면 된다'는 대답에 나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시간은 언제 멈췄을까, 그리고 어떻게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여러 등장인물들 중 마음이 가장 아리게 했던 사람은 보경이었다.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보며 이게 과연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마 내 인생에 찾아온다면 그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될 것이다. 그건 보경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남편이 죽은 뒤로 '시간이 멈춰버렸'지만 주어진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참아오고 자신을 속이고 애써왔던 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사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다 아프다. 장애를 가졌고 그 때문에 드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사는 은혜, 어렸을 때부터 언니에게만 관심이 쏠린 탓에 자기주장과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살아온 연재. 언니를 돕는 것마저도 '언니를 도와달라'는 엄마가 자기를 찾는 유일한 이유이기에 묵묵히 따른다. 어린 나이부터 이용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말 투데이, 조연이긴 하지만 항상 외톨이었던 지수까지. 답답할 때도 있지만 너무나도 이해가 가는 각자의 사정에 이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사람을 소외시켰다는 내용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에스컬레이터, 버스.. 애초에 이런 것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두가 똑같이 걸어다녔을텐데.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은혜는 '사람들은 원하지도 않은 도움을 주고 불쾌해하면 선의를 무시한다며 화를 낸다'고 토로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도움이 아니라 '자유로움'이라고. 우리가 편하고자 만들어낸 과학기술은 대부분 비장애인의 편의만을 생각하며 발전해왔다. 그 혜택은 공평하게 누려지고 있는지, 과학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소외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SF소설임에도 SF소설이라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기대했던 미지의, 기상천외한 소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심사평에서도 나왔듯 '이 점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탁월한 작품이었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지개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과학기술이 나아가야할 방향-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눈부신 파란 하늘같은 작품이었다. 나는 SF 소설에 정말 관심이 없다.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첫 SF 소설이 너무 좋아서, 한국과학문학상을 받은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천 개의 파랑(286p)


(바닥에 유리병을 왜 버려요? 그런 거 법으로 막을 수 없나)인간도 맨발로 다니면 돼요. 그럼 거리는 실내처럼 깨끗해질걸요.

천 개의 파랑(237p)


작년 10월에 읽고 썼는데 이제야 올린다.

두 반째 단락에 쓰인 말들이 작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 조각 같아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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