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간다
'내가 달리기를 할 때 말하고 싶은 것'이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은 후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기로 했다. 가장 유명하고 초기작이라고 해서 골랐다. 소설은 묘사와 필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약한 줄거리를 읽기보다는 직접 글을 읽어야 작가의 의도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줄거리도 그 안에서만 온전히 살아숨쉰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아, 이 책은 진짜 후기 쓰기가 어렵겠구나' 싶었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20대 남자가 여러 여자들과 섹스하는 내용이 노골적으로 나오고 그들에 대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묘사를 서술한 책이다. 이렇게만 적으면 한심하고 외설적인 책으로 보이는데, 나의 부족한 언어 표현능력으로는 이 소설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한 젊은이의 사랑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다소 혼란했던 시대 분위기도 함께 느낄 수 있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연애와 어지러운 감정도 이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가까운 곳에서 '죽음'이 참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겉으로는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항상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나가사와 선배라는 아주 능력있는 개**가 등장하는데, 인성은 별로지만 다른 부분만큼은 정말 닮고 싶다. 나는 자기절제를 완벽하게 해내고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를 바라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항상 따르고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을 동경하는데, 나가사와는 그에 가깝다. 여자입장에서 보면 와타나베도 나쁜놈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결국 섹스하고 하룻밤 자는 여자와 소중한 여자를 구분해서 다르게 취급하고, 지 멋대로 사는 건 결국 똑같다. 또 그다지 헌신적이지도 않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라면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거나 자위할 시간에 매주 직접 만나러 갔을텐데 말이다. 그와 별개로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나도 참고할 수 있게, 하루키가 여자버전으로도 하나 써주면 좋겠다.
이 소설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좋아할거면 제대로 좋아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행동보다는 입만 살아있는 듯한 내용이 나올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본 말 처럼, 소설은 '주인공과 친구'하려는 게 아니니까 '옳고 그름을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20대의 평범한 연애 이야기라고 하는데 나는 전혀 이런 삶을 살지 않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흡입력 있는 문장 덕분에 몰입해서 읽었으니까. 그 묘사와 서술방식을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소설의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팔렸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고, 나 역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이 책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정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서양곡이 많이 나오는데, 이 노래들은 하루키의 취향일까, 하고 생각했다.
소설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건 가와무라 미나토씨의 작품해설이었다. 숲이라는 한자는 森(나무빽빽할 삼) 나무 세 그루를 세워놓은 것과 같다고. 이 소설도 삼각관계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이 된다고. 이 문장을 읽고 '와! 어쩌면 이런 해설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하며 감탄했다. 일본인 작가가 한국 시를 떠올린 것도 놀라웠다. 강은교 시인의 <숲>이라는 시를 소개했는데, 소설의 해석과 너무 잘 어울렸다. 실제로 이 소설은 두 사람만의 달콤한 연애는 거의 없고 항상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되짚어보니 이 소설에는 대부분의 관계가 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불쾌하거나 불편한 감정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어어...? 하고 살짝 미묘한 감정이나 의심을 품는데 그쳤다. 미워하고 질투하기보다는 서로를 친하게 생각하고,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미나토씨는 이 관계가 '수많은 삼각형이 퍼즐처럼 짜맞추어진 소설인 셈이며, 그 삼각관계는 연인끼리의 남녀 두 사람의 관계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세 발 솥은 두 다리만으로는 세울 수 없다고,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두 다리)만의 관계로는 이뤄질 수가 없으며 그 관계 자체가 마음의 병을 낳았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둘보다 셋이 있을 때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느꼈던 건 이 때문인 것 같다.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장을 청소하고 빝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285)
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 #서평 #상실의시대 #노르웨이의숲 #노르웨이 #감상 #서평 #독후감 #느낀점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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